이기풍은 1868년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역 글짓기대회에서 장원을 할 정도로 비범한 소년이었으나 가난으로 인한
울분을 외국인 선교사를 공격하는 것으로 풀곤 했던 평양의 깡패였다. 복음을 전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쫒아내고, 장대현교회를 부수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기풍은 청일전쟁으로 피폐해진 평양거리에서 스왈른 선교사를 만나 예수에 대한 복음을 듣고 회개했으며, 황해도 지역의 조사
겸 권서가 되었다. 마펫 선교사의 권유로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07년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이기풍에게 주어진 선교사역지는 제주도였다. 당시 제주도는 외국과 다름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제주도는 말과
풍습이 달랐고, 외지문화에 대한 배타성이 강한 지역이었다. 폭풍과 조난, 통하지 않는 말과 풍습, 형편없는 전도 여건 등으로 제주도 선교 7년은
고난의 기간이었다.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이기풍 선교사는 성안교회를 비롯해 9개 교회를 개척하고 1000여 명의 신자를 길러냈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였으며,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제주도 선교를 마친 후 24년 동안 이기풍 목사는 전라도 광주, 순천 지역 복음화에 헌신했으며, 노회장과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 당시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1930년대 들어선 이후 한국 교회와 신자들에게 악랄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었다.
결국, 1938년 9월, 여러 교단 중 마지막으로 장로교 총회가 이에 굴복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이기풍 목사는 이미 은퇴를 해야 하는 나이였지만 목회자가 부족한 시골교회 사정으로 여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으나
신사참배를 결사적으로 거부했다. 결국, 1940년 11월, 17명의 동료 목사들과 함께 검거, 투옥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72세로 검거된 목사
중 최고령이었지만, 배교를 거부하고 온갖 고문을 견뎌냈다. 결국, 일제는 건강을 해친 이기풍 목사를 투옥 2년 만에 병보석으로 석방했지만,
석방된 지 1주일 만인 1942년 6월 2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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