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진 목사는 189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초기 기독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초대 교인
가정이었다. 김예진은 평양 숭실학교에 이어 숭실대학에서 공부했다. 숭실대학 재학시절, 순천지역에서 전도사로 헌신했고, 1919년 1월에는
평양신학교 시험에 합격했다. 입학을 기다리는 동안 3.1운동이 전개되었다. 산정현교회 집사였던 그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6개월 형을 받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틈을 이용하여 상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평안남도 청년단과 결사대 조직의 임무를 띠고 조국으로 밀파되되어
평안도청 폭탄투척사건을 주도했으며, 두 번에 걸쳐 체포와 투옥, 도피가 이어졌다. 그리고 망명 7년만인 1926년 5월, 상해 일본영사관
폭탄투척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세 번째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평양으로 압송된 김예진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복역했으며
1928년 12월 출옥했다.
출옥 후 2년이 지난 1931년 봄, 김예진은 13살 때부터 꾸었던 꿈인 목사가 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실로 20년만의
결실이었다. 신학교 재학 시절, 김예진은 청년시절 심취했던 시국사건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철저한 보수신앙으로 오로지 말씀과 기도에
진력했다. 산골교회에서 전도사로 헌신했다.
1938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원군 갈원교회와 용현 구읍교회에서 시무했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때였으므로
목회가 평탄할 수가 없었다. 만주에서도 목회를 했으나 여기서도 일제의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설교를 하지 못하게 핍박했고, 심지어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해방을 맞은 북한에서는 일제의 탄압 대신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이 시작되었다. 결국 김예진 목사는 월남을 결행했다. 서울 후암동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시작한 기도모임이 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김예진 목사를 청빙했다. 후암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후암교회가 홀로 설 수 있게 되었을 때
김예진 목사는 스스로 협동목사로 물러나 총회 순회목사가 되어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이끌기 시작했다. 그가 약 2년 동안 전국에 세운 교회만
13곳에 이른다.
1950년 6월, 일본 교토의 재일 조선인들이 그에게 와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한반도를 침탈했던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할 꿈에 부풀었던 그에게 6.25전쟁의 발발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후암동 집에 은거하던 김 목사가 집을 나서 광나루를 향해 가던 중한
청년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순간 그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그 청년은 골수 공산주의자였고, 숨어 있는 기독교인을 찾던 내무서원이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일이었다. 배교를 거부한 그의 어깨에는 ‘민족반역자’ ‘미 제국놈에게 딸을 팔아먹은 목사’라는 걸개가 걸렸다. 그리고 사람들
속을 강제로 끌고 다녔다. 사람들은 그에게 욕을 했고, 돌을 던졌고, 그럴 때마다 몽둥이세례가 이어졌다. 그리고 8월 10일, 경기도 광주군
경인리 석바지에서 20여 명과 함께 흉탄에 쓰러졌다. 마지막 남길 말을 묻는 이들에게 “형제들이여, 예수 믿고 구언 받으시오”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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