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침례교단 총회장(감목)이 된 이종덕 목사는 1884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한학다가 펜윅 선교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이어
1907년경 복음을 잗아들였고 공주교회에 설립한 펜윅선교사의 성서학원에 입학했다. 침레교 역사상 최초의 신학생이 된 것이다. 당시 펜윅 선교사는
파울링 선교사 등에 의해 시작된 강경교회(최초의 침례교회)를 엘라씽선교회로부터 이양받아 인도하고 있었으며, 1906년에는 이곳에서
대한기독교회(침례교의 전신)라는 교단을 창립했다.
이종덕은 펜윅으로부터 성경과 신학을 배웠으며, 1912년 목사가 되었고, 2년 후인 1914년, 30살의 젊은 나이에 펜윅 선교사에
이어 대한기독교회 2대 감목이 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한 교단의 실질적인 대표가 된 것이다. 나이가 젊고 목사로서의 경력도 일천한 그가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감목이 되자 그보다 나이가 많은 중진 목사들이 교단을 탈퇴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종덕 목사는 실천으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에 힘썼으며, 만주와 시베리아 동포를 향한 전도에 노력했다. 외지
선교로의 방향 전환은 훨씬 크고 자금력도 풍부한 장로교, 감리교 등에 의해 전도지역에 제한을 받고 있던 침례교로서는 부득이한 선택이기도 했으나
오히려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종덕 목사 스스로 외지 전도에 앞장섰다. 감목 임기 10년 동안 만주 6개 지역에 100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했고, 1921년에는 간도에 성경학원을 세워 현지 교회 지도자를 양성했다. 1924년 전치규 목사에게 감목 직을 넘긴 후에는 또다시 순회
전도자가 되어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침레교는 이에 끝까지 저항했다. 이종덕 목사 역시 이에 저항했으며,
그 대가로 구속되어 약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후 이종덕 목사는 만주 봉황성 선교사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리고 이후 8년 동안 만주
전역을 오가며 선교에 진력한 후 1946년 초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그의 후임으로 침례교를 이끌었던 전치규 목사는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이종덕 목사는 자신의 믿음이 시작된 강경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고, 1946년 9월 재건된 동아기독교회 초대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총회장이 된 후 선교와 목회자 양성을 위해 강경에 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고 교단 이름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바꾸었다. 교단
부흥을 위해 불철주야 헌신하던 때 6.25전쟁이 발발했고, 강경 역시 수일 만에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모두들 피난할 것을 권했지만 총회장으로서
본부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며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군 부대와 내무서 등을 찾아다니며 기독교를 전했다. 서울이 수복된 후 차단된 퇴로를 찾아
도피하던 북한군은 교단 본부를 지키고 있던 이종덕 목사와 한 교인을 인질로 잡아가다가 금강변에서 이종덕 목사를 총으로 쏘아 처형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종덕 목사는 함께 끌려가던 교인을 탈출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홀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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