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은 1902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출생했다. 당시 그의 이름은 손연준이었는데 훗날
그가 애양원을 시무하면서부터 손양원으로 개명했다.
그가 태어날 때에는 가족이 예수를 알지 못했으나 손양원이 7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어린 손양원도 이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고향에 있던 칠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중동학교에 진학했으나 아버지가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됨에 따라 학교를 중퇴했다.
손양원은 낙향 3년 만에 학업의 꿈을 이어가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스카모중학교에서
3년 간 수학하고 돌아왔다. 일본에서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배달을 하는 한편 틈이 날 때마다 거리에서 노방전도를 벌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도쿄성결교회 나카다 목사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귀국하여 경남성경학교에서 전도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성경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5년 동안 울산, 양산, 부산 등지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손양원은 1935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당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날로 극심해졌지만 손양원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신사참배를 두고 목회자 사회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당시 평양신학교는
이를 거부했고, 손양원이 졸업한 직후 문을 닫고 말았다. 손양원은 전통 있는 평양신학교의 마지막 졸업생인 셈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지 1년 여 만인 1939년 7월 손양원 전도사는 여수 애양원교회에
부임했다. 졸업 후 부산을 비롯한 전국 각지를 돌며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애양원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한 직후 청빙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당시는 이미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한 후였고, 그가 순회 전도를 하던
경남노회에서도 신사참배를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양원 전도사는 학생 시절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었으므로 청빙은커녕 목사안수조차 어려운
실정이었는데, 마침 애양원교회에서 그를 청빙한 것이었다. 손양원과 애양원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애양원교회에 부임한 손양원 전도사는 한센병 환자로 구성된 성도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한편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적극 설교했다. 애양원교회에서는 물론 전국에서 인도한 부흥회에서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과 나라는
반드시 멸망한다고 설교했다.
이러한 설교로 인해 요시찰 인물이 되었던 손양원 전도사는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를 마치고 예비검속되어 유치장에 갇혔다. 1년여 동안 구속수사를 받았고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1943년 만기 출소일이
다가왔지만, 신사참배와 사상전향을 해야 석방할 수 있다는 협박을 끝내 거부하여 석방되지 못했다.
결국 해방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 청주형무소에서 석방될 수 있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손양원 전도사는 모두 6년여의 옥고를 치룬 것이다. 손양원 전도사는 해방과 함께 석방되자마자 애양원교회로 달려가 또다시 그들을 위한
사랑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1946년 3월에는 목사안수를 받았다.
1948년 10월, 애양원교회가 있던 순천과 여수 지역에서 여수순천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순천에 있는 순천사범학교와 매산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들에게 기독교를 전하는 한편 공산주의의 잘못을
알렸던 두 아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첫 번째 표적이 되었고, 결국 비참하게 처형되었다.
여수순천사건이 진압된 후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도 체포되어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때 손양원 목사가 나섰다. “나의 두 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직 예수를
모른다. 그를 내게 돌려주면 아들로 삼아 예수의 사랑을 알게 하고 싶다”고 청원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는 그 청년을 아들로 삼았다. 그 청년은
후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
손양원 목사의 한없는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예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알게 해주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침략으로 6.25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한
달 만에 전라도 지역까지 점령당했다.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피신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애양원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서서히 반격하던 국군과 유엔군의 활약으로 잃었던 국토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9월 초부터는
호남지역도 공산군의 수중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퇴로를 막힌 공산군 세력은 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이 되었으며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9월 13일 손양원 목사는 빨치산에게 체포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이 단행되기 이틀
전이었다. 결국 손양원 목사는 서울이 국군에 의해 수복되던 9월 28일, 여수 근교 미평이란 곳에서 총살형을 당하여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랑을 베푼 그였지만,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는 처단해야 할
반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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