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김병조 목사는 1877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배워 서당에서 훈장으로
일했으며, 망국의 세태를 보며 민족계몽운동을 펼치기 위해 1903년, 고향에 변산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09년 김관조
목사의 전도를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1911년 세례를 받았다. 191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병조 목사는 1919년 2월, 평안도 지역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이승훈 장로를 만난 자리에서 3.1운동 거사계획을 들었으며,
이승훈 장로의 권유에 의해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3.1운동 선언 당일, 김병조 목사는 서울로 가는 대신 평안도 지역 만세운동을 조직했다. 그리고
그는 33인의 대표 중 유일하게 일본 경찰에 체포되지 않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임시정부에서 김병조 목사는
의정원 의원(평안도 대표) 선전위원회 이사와 사료편찬위원을 역임했다. 김병조 목사는 1923년에는 상하이를 떠나 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광복회를
조직해 무장투쟁을 벌이려고 했으나 좌절을 겪었고, 대신 독립운동 사료 수집과 편찬에 힘을 기울여 1924년 <대동역사>
<독립혈사> 등 독립운동 사료집을 발간했다. 이외에 민족신문이 한족신문을 발행하고 민족교육기관인 삼성소학교와 광명학교, 신일소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서간도지역에서는 독립운동과 함께 목회자로서의 활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마적떼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납치와 습격을 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다.
김병조 목사는 1933년 망명 13년 만에 귀국했다. 당시는 일제에 의해 만주사변이 발발한 직후로 만주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애국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귀국한 것이다. 귀국 후에는 동상교회, 북평교회, 신서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에 전념했으나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목회 활동을 접었으며, 고향 인근 묘두산에 은둔했다.
은둔생활 중 광복을 맞은 김병조 목사는 북한 공산당과 소련군의 회유를 거부하고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에 참여했다. 그는,
반소련무장비밀결사인 반공광복단을 조직하여 반공운동을 펼치다가 1946년 겨울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2월 시베리아 수용소로 유배되었다.
수용소에서도 김병조 목사는 예배를 드렸고, 함께 수용된 이들에게 애국과 믿음을 강조했다. 1949년 8월 이후 두세 차례 다른 곳으로 비밀리에
격리되곤 했으며, 1950년 6.25전쟁을 전후하여 총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90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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