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소르기는 엘림 성경 학교(Elim Bible Institute) 음악 감독을 지냈고, 뉴욕의 시온 펠로우십(Zion Fellowship) 교회 담임 목사로 있다. 엘림 성경 학교와 로체스터에 있는 로버트 웨슬리언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탁월한 피아노 연주가이다. 현재 미국 전역을 다니며 세미나 강사로 사역하고 있다.
최 혁 서울 대학교와 독일 퀼른 대학교, 미국 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뉴저지에 있는 포도나무 교회 담임 목사이다.
1부 찬양과 경배의 핵심
1장 찬양이란 무엇인가?
찬양의 핵심
찬양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방향을 맞추는 것이며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찬양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사전을 통해 보겠습니다. “칭찬하다, 갈채를 보내다, 존경 또는 인정을 표현하다. 말이나 노래로 높이다, 크게 보이게 하다, 영광을 돌리다.” 이 정의 속에 포함된 찬양의 두 가지 방향을 유의해 보십시오. 우리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거나 혹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외감을 표현함으로써 찬양하게 됩니다. 찬양은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드릴 수도 있고 하나님에 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표현함으로써 드려질 수도 있습니다.
찬양의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외부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양을 활기찬 축제 분위기에서 노래, 외침, 말, 악기 연주, 춤, 기타 다른 외적인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찬양은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구약 특히 시편을 공부해 보면 히브리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 매우 감정적이었으며 또한 목소리를 한껏 높였음을 보게 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 이러한 생각들이 찬양으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팔장을 끼고 머리를 숙이고 입술을 다물고 말합니다. “이건 내가 여호와를 찬양하는 방법이란 말이야.” 옳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첫째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데 ‘내 방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그의 방법을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은 우리에게 찬양은 선포되거나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편66:8은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라고 권합니다. 찬양은 목소리로 귀에 들리거나 눈에 나타나야 비로소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입을 다물고 몸을 숙인 채로는 찬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세로 경배나 묵상, 기도를 하거나 잠은 잘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찬양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선지자는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이라!”(사40:9)고 외쳤습니다. 찬양에는 목소리를 쓰는 경우와 쓰지 않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어떤 모습이건 찬양은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노래를 잘 부를 수 없다면 하나님께 말로써 찬양드릴 수 있습니다.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얼굴 표정과 몸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찬양의 모습들을 아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가 원해서 드리는 순수하고 당당한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나의 방법이 아니라면 손들고 찬양하는 것을 우리의 찬양 방법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손을 드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나의 진정하고 자연스러운 표현이 될 때까지 우리는 그것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찬양은 의지로부터 나온 기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찬양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찬양은 우리의 기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위대하심이 찬양의 근거이므로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드슨 콘월 박사님은 히브리 사람들이 몇 해를 기다려서라도 자녀들의 성격에 맞는 이름을 지어 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풍습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신의 다양한 이름을 알려 줌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5:26에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여호와 이레”로 당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에스겔 마지막 구절에서는 “여호와가 계시다”는 의미의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겔 48:35).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결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찬양드릴 때 성경에 나타내신 다양한 이름들 모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유다와 찬양
개인의 성격에 따라 이름을 붙여 주는 히브리인의 관습에 따라 레아는 야곱에게서 낳은 넷째 아들을 ‘유다’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를 ‘유다(문자적으로‘찬양’을 뜻함)’ 라고 부른 이유가 창세기 29:35에 있습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레아는 자기 남편이 라헬을 사랑할 때 자기에게 넷째 아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이 아들을 ‘찬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시114:2). 하나님은 당신의 성소를 찬양하는 사람들 가운데 두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구별된 것에 유의하십시오.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토였지만 그의 성소는 유다 즉 찬양하는 무리 가운데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 크시도다”(시76:1). 여기서도 유다 이스라엘은 구분되어 있는데 이스라엘은 모든 교회의 전형이고 유다는 찬양자들의 전형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서 위대하신 분이지만 찬양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알리십니다.
사무엘하 5장은 다윗 왕이 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하기 전에 7년 동안 유다를 통치한 사실을 이야기해 줍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왕위에 대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유다 족속은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번째 족속이었습니다. 다른 족속들은 다윗을 왕으로 받아들이는 데 7년이나 걸렸습니다. 오늘 찬양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찬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새로운 일들을 가장 쉽게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자가 되어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주님을 찬양해야 하나?
먼저, 우리는 말씀을 통해 명령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를 찬양할지어다”(시150: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찬양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유의하십시오. 왕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합니다. 당신은 “왜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이 필요하신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부를 좋아하는 자기 우월주의에 빠지신 분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찬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찬양이 하나님께 유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것과 상관없이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찬양하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 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자라날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시22:3).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너무나 기뻐하셔서 문자 그대로 하나님 자신을 찬양 가운데 둘러싸이게 하시며 찬양 속에 잠기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찬양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셋째, 찬양 속에는 힘이 있습니다.
스스로 싸우던 우리의 싸움을 멈추고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겠다는 하나님을 단순히 찬양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의 권능과 모든 준비를 자유롭게 풀어 놓으십니다. “찬양은 영적 전쟁의 무기이다”라는 장에서는 찬양이 무기로써 어떻게 쓰여지는지 자세히 설명할 것이며 또 어떻게 찬양이 승리와 권능과 구원과 축복을 가져오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좋은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정직한 자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매우 즐거운 일입니다(시135:3).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에게는 합당한 일입니다.
다섯째.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송하리로다”(시48: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마틴 루터의 훌륭한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도 자신 속에는 찬양할 만한 것이 전혀 없고 찬양하기에 합당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만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여섯째,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예레미야 13:11, 사43:21 참조-
언제 찬양해야 하나?
먼저, 우리는 우리가 찬양하고 싶을 때 찬양합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또한 찬양하고 싶지 않을 때도 찬양합니다(시42:5참조). 때때로 사람들은 우리들을 비난합니다. “당신의 찬양은 단순히 감상주의에 불과해요!” 그러나 감상주의는 개인 감정에 따르는 것입니다. 찬양은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우리의 주도권을 요구하는 일종의 훈련입니다. 감상주의란 우리가 찬양하고 싶을 때에는 겉으로 나타나지만 찬양하고 싶지 않을 때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진짜 감상주의라면 찬양할 기분이 아닐 때 찬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찬양의 수준을 지배하는 것이 감상주의입니다. 진정한 찬양은 감상주의와 반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찬양이 감상주의는 아니지만 감정적이라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감정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참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창조하셨고 찬양은 우리의 감정을 풀어놓는 가장 고상한 방법입니다. 마리아의 송가에서 마리아는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 하였음은”(눅1:46-47). ‘흔적인(내 마음이)’ 찬양과 ‘영적인(내 영혼이)’ 찬양 모두가 올바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마음과 영혼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좋은 때는 지금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몸에는 비타민 C를 저장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써 버리든가 아니면 내 버리든가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찬양을 저축해 둘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때입니다.
시편 42편 기자는 ‘지난 주일 증후군’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시42:4-5). 사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지난 주일에 저는 멋지게 찬양드렸습니다. 노래하고 크게 외치고 소고 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찬양으로 인도했습니다. 주님 지난 주 예배는 참 영광스런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는 어찌 된 일입니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고 무질서해졌지요?” 혹시 하나님을 체험하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다가 감정의 깊은 계곡으로 떨어져 본 경험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경험을 의지함으로 ‘나는 지난 주 내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시편 기자와 같이 “오히려 나는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라고 말할 때입니다.
넷째, 성경은 하나님을 송축하기 위하여 일찍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라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성경은 또한 늦은 밤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찬양)하리이다”(시119:62). (히브리어 ‘야다’ 는 ‘감사하다’ 또는 ‘찬양하다’로 모두 번역할 수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감사’로 번역하였다.) 다윗 왕 시적의 레위인들은 하루 24시간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 음악인들은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대상 9:33)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찬양드리기 위해 한밤중에도 당번을 정해서 찬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어떤 자극이 없어도 하나님 찬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약의 제사장으로서 “항상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부르셨습니다(히13:15). 이것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모든 일이 뒤틀려 있는 힘든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일이 잘 안 풀릴 때의 처방을 다음과 같이 내렸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이 말씀을 현대식으로 고치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제가 흔들리고 실직이 늘어나며 공산주의가 팽창하고 테러가 난무하며 차가 고장나서 아내가 시내 한복판에 묶여 있으며 의료 보험이 막 끝났는데 아이의 팔이 부러졌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가식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이때가 바로 우리가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올바른 시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디서 찬양해야 하나?
성경은 어떤 특별한 장소가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적당한 장소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임에서 일어나는 찬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중 가운데서 찬양할 때 기뻐하십니다. 많은 시편의 구절들이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시22:22, 25).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26:8, 12).
하나님께서는 회중 경배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모두 좋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통일성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똑같은 멜로디와 똑같은 가사로 동시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회중 찬양과 경배에는 표현의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항상 함께 일어서고, 함께 앉고, 함께 손을 들고, 함께 손뼉치고, 함께 말하고, 함께 노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행동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통일성을 유도하는 것은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종 다양한 찬양과 경배의 표현들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도 매우 좋습니다.
모세 성막의 지성소에서 사용되었던 향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향료들을 혼합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회중의 다양한 찬양이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릎 꿇고, 어떤 사람들은 손을 들고, 또 어떤 사람들은 춤을 출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질서가 아닙니다. 질서정연한 다양성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적합한 장소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나라들 앞에서입니다. “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40:3). 이런 구절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오직 성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만민에게 전달되고 하나님의 영화로운 찬송이 불려지며 하나님의 찬송이 불신자들과 온 세상에 선포되기를 항상 원하십니다.
어떻게 찬양해야 하나?
손을 드는 것은 찬양의 일반적인 형태로서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느8:6, 시28:2, 63:4, 134:2, 141:2, 딤전2:8 등등). 당신은 왜 성경이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손을 들라고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왜 이런 찬양의 모습에 감동받으시는지 보겠습니다.
먼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구약의 성막으로 돌아가 봅시다. 민수기 7 : 89 은 이 성막을 “회막”이라고 불렀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나님께 말씀드렸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고자 했음을 알려 줍니다. 사무엘상 4:4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룹 사이에 계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룹들의 날개는 속죄소와 증거궤 위에 펼쳐졌고 날개의 끝은 서로 맞닿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 때 우리의 행동은 그룹의 현대적 표현으로서, 우리의 벌린 두 팔은 그들의 날개와 같은 것이라고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 주겠다고 말씀하신 곳은 바로 그 그룹의 날개 사이, 즉 우리의 올려진 손 사이입니다.
손을 드는 두 번째 이유를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아들은 아장아장 걸으면서 아빠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저녁 때 사무실에서 돌아오면 아들은 문에서부터 손을 뻗치고 저를 맞이합니다. “아빠 저를 안아 주세요!” 그는 내가 안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꽉 껴안아 주기를 바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하나님께 손을 들 때는 저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안아 주세요! 저를 하나님 가슴까지 꽉 안아 주세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요!”
세 번째, 손을 들고 기도하면 기도에 보다 집중할 수 있고 마음이 이리저리 분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찬양드릴 때 많은 사람들이 산만해지는 것을 걱정하는데 두 손을 올리는 것은 이때 도움이 됩니다.
네 번째, 만약 어떤 사람이 등에 권총을 대고 “야, 꼼짝 마!”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마 당신은 손을 번쩍 들 것입니다. 그것이 총잡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세입니다. 손을 올렸을 때가 가장 무방비로 공격당하기 쉬운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싸움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주먹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팔을 내려 가슴을 가릴 것입니다. 우리가 팔을 꼬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손을 높이 드는 것은 성령님께 우리 마음과 삶을 열기 원한다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손을 올리는 행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행하신 모든 역사를 받아들인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축구 선수는 공을 잡기 위해 손을 벌립니다. 공을 잡기 위해서는 아주 좋은 자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표시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반화된 찬양의 또 다른 표현은 손뼉을 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오직 한 구절에서 직접적으로 손뼉치며 찬양하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47:1). (나무들이 손뼉을 치는 구절도 있습니다. 시98:8, 사55:12 참조) 손뼉을 친다는 인용구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이것이 찬양 형태로서 비교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찬양할 때 손뼉을 치는 행동은 분명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손뼉 치는 것을 때때로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너무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 없이 쳐대는 손뼉은 그야말로 공허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찬양 형태를 연구해 보면 손뼉 치는 것이 박자를 맞추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손뼉을 치는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만드는 또 하나의 형태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표현할 때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요란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우리 심령이 하나님 찬양하는 일로 뜨거워져 있다면 자연히 손뼉을 치는 것 같은 크고 즐거운 형태로 찬양을 드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하기 바랍니다. 찬양은 소음 그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님께 반응하는 심령의 깊은 곳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악기를 연주했다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악기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음악이 멈추면 찬양과 경배도 즉시 멈추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악기를 연주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께 상달돼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을 돕기 위하여 악기 사용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음악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음악적 감각을 갖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음악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 찬양의 형태를 갖추도록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은 악기가 단순히 예배 때 반주하는 것 이상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그 자체가 경배인 것입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소고치며 춤추어… 현악과 퉁소로… 큰소리 나는 제금으로…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시159:3-5).
찬양의 또 다른 모습은 서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에서 하나님은 많은 기구들이 지정된 대로 제작되어 장막 안에 배치되도록 자세히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기구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의자입니다!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일을 완수할 때까지 하나님 앞에 계속 서 있어야 했습니다. 서 있는 자세는 오늘날 신약 시대 제사장들인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매우 적합한 자세입니다. 성경은 서 있는 자세가 찬양과 경배를 드리기에 좋은 자세임을 많은 구절을 통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대하 5:12, 7:6, 29:26, 시135:2, 계4:9-11). 일어서서 찬양하는 것은 특별히 두 가지 강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존경을 나타냅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하늘 나라의 경배 모습을 보면 왕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은 그 보좌 둘레에 서 있습니다. 그분은 앉아 계시고 우리는 서 있는 것입니다.
둘째, 서 있는 자세는 깨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무릎 꿇는 것, 허리 굽히는 것,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 이러한 자세들은 찬양과 경배에 매우 적절한 모습입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95:6).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계19:4). 요한계시록 전체에 나타난 하늘에서의 분명한 경배 모습은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노래한다는 것은 아마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찬양 형태일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노래하라고 수도 없이 권고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성구를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특히 시편은 이러한 권고들로 그득한 창고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냥 말로만 찬양할 수는 없나요? 왜 노래로 찬양해야 되나요?” 그 대답은 음악의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모여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를 중얼거린다고 합시다. 이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단순한 단어들이 감미로운 곡조와 조화를 이루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가슴은 하나님을 향해 고조되고 우리 영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감동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귀에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찬양은 그것이 들려서 귀에 전달되고, 목소리로 나타내지기 전까지는 찬양이 아닙니다. “주님의 찬양을 크게 선포하오니(proclaiming aloud your praise)”(시26:7, 개역 성경은 이것을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라고 번역하였다.). 아들 요엘이 기저귀 떼는 훈련을 할 때 우리 부부는 요엘이 변기를 사용할 때마다 긍정적 강화를 주기 위하여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저 요엘을 바라보면서 참 잘했다고 생각만 한다면 요엘은 더 오랫동안 기저귀 신세를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칭찬의 생각을 찬양의 도구를 사용하여 말했을 때 요엘은 호의적으로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엘에게 법석을 떤 것처럼 당신이 뉴욕 양티즈팀에 법석을 떨었다면 그들은 월드 시리즈에서 승리했을지도 모릅니다. 칭찬은 목소리로 내기 전까지는 사실상 칭찬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 역시 그것이 찬양이 되려면 귀에 들려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댄스가 외부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인다는 이유로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찬양 표현들이 그렇듯이 결국 이러한 표현들은 외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합리화하기 위하여 성서적인 개념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곤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춤추는 것이 모든 예배의 한 부분이 돼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미리암은 이스라엘 여인들을 춤추도록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인 ‘애굽 군대’들을 방금 전에 익사시키셨다면 우리도 춤을 추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홍해의 경험을 많이 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온다면 적절한 방법으로 기꺼이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민족에게 춤추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찬양 형태입니다. 그들에게 댄스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나는 보이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춤을 춥니다. 그러나 훈련되고 능력 있는 댄서가 춤으로 찬양드리는 것을 볼 때는 매우 즐겁습니다. 춤추는 것의 이점은 신체적인 자유함입니다. 춤은 우리의 거부감을 제쳐놓고 온몸으로 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비추는 흥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전15:46). 순서는 첫째가 육이요 그 다음이 영입니다. 우리가 뒤이어 따라오는 영적 자유함을 안다면 먼저 육신적 자유함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목적은 영적 자유함이지만 때때로 그것은 육신적 자유함이 없고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손을 드는 것, 허리를 굽히는 것, 춤을 추는 것 등은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2:30). 그렇다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전심으로, 온 힘을 다해 표현하려고 했습니까? 춤추는 것이야말로 그 한 방법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다른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온 힘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하는 사람이 회중 앞에서 바닥에 엎드려 팔 굽혀 펴기를 몇 번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온 힘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서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춤은 성서적입니다. 우리는 매우 육적인 피조물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영, 혼, 육을 모두 사용하여 하나님께 찬양드릴 때 기뻐하십니다. 춤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스스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춤이 가져다 주는 영적 자유함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육신적으로 주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적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주저하는 것이 있다는 표시입니다. 만약 우리 마음 가운데 움츠러드는 것이 있다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적 제한을 벗어 버리고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춤출 수 있을 만큼 단순해진다면, 우리의 영적 제약은 무너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보다 자유롭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외치는 것도 찬양의 한 형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즐거운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시47:1). 킹 제임스 역(KJV)은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만들라(Make a joyful noise unto the Lord)”라고 번역한 시편의 여러 구절들이 NIV에서는 “하나님께 즐겁게 외칠지어다(Shout to God with cries of joy)”라고 더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시66:1, 81:1, 95:1-2, 98:4-6, 100:1 참조). “할렐루야”의 어원인 히브리어 “힐렐”은 “크게 외치다 또는 큰소리가 터지다, 특히 기뻐 외치다”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 때 소리지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여 소리지를 때 적들은 무서워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외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리고 전쟁에서 이 외침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승리를 가져다 주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찬양의 외침이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모임에서 찬양의 외침 소리가 멈추었다는 것은 교회에서 매우 슬픈 일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도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아름다운 방법입니다. 방언과 함께 예수님께서 그의 교회에 주신 성령 세례의 귀한 은사들을 우리가 얼마나 소중히 하고 있는지요. 우리가 직접 영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 자유함을 맛보게 되는지! 아직 방언의 자유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경험을 정말 사모할 것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찬양하는 축복을 알기 전까지는 찬양에 있어서의 어떤 역동성과 흐름도 상실되어 있을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찬양을 드리든지 우리는 우리의 전존재로 찬양드려야 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시103:1). 마가복음 12:30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귀한 계명에 대하여 강조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찬양의 절정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2장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들어간다고 말할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에는 다양한 표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어도 세 종류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십니다(마18:20). 이것은 하나님 임재의 좀 특별한 표현입니다.
셋째, 역대하 5:13-14은 노래하는 자들과 연주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열었을 때 솔로몬의 성전은 영광의 구름으로 가득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영광의 구름(하나님의 임재)이 너무도 웅장하여 제사장들은 서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임재의 매우 독특한 모습이며 오늘날 우리가 찾고 있는 것과 똑같은 성격의 똑같은 형태의 나타내심입니다.
성전에 구름이 가득할 때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그들 주위의 아무 것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임재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예배의 목표 역시 주위의 아무 것도,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사로잡히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이것이 경배의 최대 목표입니다. 우리에게 그보다 더 높은 성취는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임재로 다가감
다윗 시대 이스라엘 민족들의 하나님 임재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을 기록한 대부분의 성경 구절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축하와 찬양의 노래를 가지고 나왔다는 인상을 줍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시95: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시100:2,4), (42:4, 45:13-15, 68:24-26, 사30:29, 35:10 참조)
우리가 소위 말하는 ‘예배’에는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찬양과 감사의 빠른 노래들로 시작할 수도 있고 경배와 경애의 느린 노래들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양쪽의 접근법 모두 성서적입니다. 성경적 증거에 따라 비중을 두자면 찬양의 노래들로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이 더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예배를 인도하는데 어떤 공식이 있다는 생각, 즉 못갖춘마디의 빠른 곡들로 시작해서 점차 느리고 경배드리는 노래로 진행해야 한다는 고정적인 생각은 피해야 합니다.
어떤 예배에서는 그 순서가 바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배에서는 모두 느린 노래들만 또는 모두 빠른 노래들만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고정된 예배 방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배의 공식을 갖고 주님께 나오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적당한 의식이나 틀을 갖고 계셨다면 우리에게 제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경배가 어떤 의식이나 공식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에 관계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요4:23-24 참조). 주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접근하든 간에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개인적 경배와 회중적 경배
성경은 개인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과 회중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을 구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 경배는 집단 경배와 매우 다르며 우리의 접근도 그래야만 합니다. 경배에 관해 쓰고 있는 많은 저자들은 집단 예배의 대체적인 모습으로 이사야 6장을 제시합니다. 그들의 문제는 이사야 6장이 이사야와 하나님간의 매우 특별한 만남 즉 개인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특별한 만남이라는 점을 간과한 데 있습니다. 이사야 6장이 우리 개인의 신앙 생활에는 어떤 통찰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회중 예배의 한 모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갑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임을 명심합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시100:4).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시150:1).
우리가 찬양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사2: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시24:3).
만일 만족스럽지 못한 예배를 드렸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주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문제는 항상 우리 자신입니다. 시편 132:13-14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 가운데 거하시는가에 대해 보다 정확한 이해를 제공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시온에 거하겠다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으로부터 영원히 거기에 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할 때만 시온에 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거처를 시온에 두셨습니다. 우리가 모였을 때 하나님은 이미 거기 계십니다. 우리가 찬양드릴 때 하나님은 항상 시온에 좌정하고 계십니다.
경배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모든 경배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찬양하라”(시150:1)고 말합니다. 찬양과 경배에 대한 책임은 목사나 경배 인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책임이요, 당신의 책임이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각자의 책임인 것입니다. 각 사람은 경배를 위해 자신을 준비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 중 좋은 방법은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와 찬양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교회 오는 길에 찬양 테이프를 들으며 함께 찬양하면서 올 수도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은 예배의 좋은 전주곡입니다. 성전에 들어오면 교제보다도 우선 기도 시간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토요일 저녁 밤새도록 ‘공포 영화’를 보는 것은 주일 예배를 준비하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은 교회에 출석하기 전에 이미 성령에 잘 조율되어 있어야 합니다.
경배를 준비하는 탁월한 한 방법은 예배 전에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미 알려진 죄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배 첫 시간부터 (죄를 회개하는 데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기에 애를 쓴다면 우리는 힘차게 찬양하고 경배하며 보내야 할 귀한 시간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위하여 미리 기도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드슨 콘월 박사는 신자에게 있어서 기도는 결혼 생활에서의 교제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절대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없는 성도 결코 경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적절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만약 우리 자신을 예배를 위한 기도에 부지런히 드린다면 예배에 대한 우리 관심과 참여도가 놀라우리만큼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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