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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도회 | 기다림의 어머니 -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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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아이들이 소인배로 커 가지 않고 화합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체로 커 가기를 바란다면
부모가 먼저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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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거스틴은 타고난 천재도 아니었고, 천부적으로 위인의 기질을 부여받지도 않았다. 더욱이 왕족이나 귀족 가문도 아니었으며,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재정적인 후원도 누리지 못했다. 그는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인 타가스테(Thagaste)의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파트리키우스, Patricius)는 강한 듯 보이는 이교도였으며, 어머니(모니카, Monica)는 약한 듯 보이는 그리스도인이었다. 어린 시절 어거스틴은 어머니 모니카의 사랑 속에서 기도의 눈물을 먹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사고뭉치였다. 열일곱 살 때 고향을 떠나 큰 도시인 카르타고(Carthage)에서 십여 년 동안 이름도 모르는 낯선 여자와 동거하며 죄악으로 가득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마니교라는 이교 신앙에 빠져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잊으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스물여덟 살 때에는 어머니를 속이고 더 큰 세상에서 출세하겠다며 당시의 가장 큰 도시요 ‘영원한 도시’로 불리던 로마로 갔다. 어거스틴의 신앙으로부터의 도피와 세속으로의 타락은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그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 즉 서기 385년 봄부터 시작된 듯하다. 그는 밀란(Milan)의 감독 암브로즈(Ambrose)를 만나 서기 386년 여름에 침례를 받고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북아프리카로 돌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무지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며 살았으며, 히포(Hippo)의 감독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정진했다. 그가 이룩한 포괄적인 기독교 신학의 체계는 그의 삶만큼이나 파란만장한 ‘무지개 색깔’이었다. 어거스틴은 무엇이 자신의 인생 여정을 이끌어 결국에는 기독교 신앙과 믿음으로 돌아오게 하였는지를 분명히 알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주저 없이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진리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마음, 그밖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밖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밖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주신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그렇게 큰 유익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어머니의 기도였음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젊은 시절, 방탕과 죄악의 밑바닥에서 어거스틴을 이끌어 결국에는 기독교 신앙과 믿음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로 수놓은 기다림이었다.
무려 삼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육체의 향락과 세속적인 사교와 이교 철학 등에 탐닉했던 어거스틴을 일깨워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만들었던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로 점철된 끈질긴 기다림이었다. 서기 387년, 모니카는 아들과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지난 30여 년의 기다림은 ‘그윽한 기쁨’과 ‘커다란 위로’를 보상으로 남긴 고귀한 기다림이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어머니 모니카를 일컬어 ‘눈물로 기다리는 분’이라고 칭하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이여,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면 그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제게 이런 어머니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이 이룬 놀라운 업적이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로 수놓인 기다림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자식에 대한 변함없고 끈질긴 믿음과 기도의 힘을 보여 주는 이야기로 감동을 주고 있다.
출처 : 김영식 withinnews@gmail.com
우리 찬양권능교회 여전도회원분들도 눈물로 기도하며 기다렸던 어거스틴의 어머니처럼 기도의 힘을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는 역사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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